[기획] 대한민국 킥복싱의 형성과 전개
-1964년 ‘킹투기’에서 1970년대 국제무대까지... 한국 격투 스포츠의 제도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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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킥복싱의 초기 역사는 특정 개인이나 단체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1960~70년대 한국 사회에서 실전 격투 스포츠가 형성·제도화되어 간 과정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본 기사는 당시 공개된 연혁 자료, 사회단체 등록 기록, 대회 개최 사실 등 확인 가능한 기록을 중심으로 한국 킥복싱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본 기사는 특정 기원 논쟁을 결론짓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당시 한국 내 기록을 중심으로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데 의미를 둔다.
■ 1964년 9월, 광주에서 정리된 ‘킹투기’
관련 연혁 자료에 따르면, 1964년 9월 광주에서 당시 대한태권도협회 오도관 전남 본관장으로 활동한 구판홍은
태권도·복싱·유도·레슬링 등 기존 무술과 격투 종목의 기술 요소를 참고해 손과 발을 활용한 타격과 제압·던짐 기법을 함께 다루는 종합적 실전 무술 체계를 정리하고 이를 ‘킹투기’라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자료에는 킹투기가 단순한 기술 체계가 아니라, 화랑도 정신과 파사현정(破邪顯正), 억강부약(抑强扶弱) 등 전통 무도 윤리를 함께 지향했다는 설명도 포함돼 있다. 이는 창안자의 무도적 지향을 보여주는 맥락으로 이해된다.
■ 1965년 광주 공개 경기 행사
1965년 12월, 광주 실내체육관에서 신문사 주최 형태의 킹투기 공개 경기 행사가 열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이는 오늘날의 리그형 대회와 같은 체계적 스포츠 대회라기보다는, 새로운 격투 방식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공개 행사 성격으로 해석된다.
이 시기를 전후해 킹투기는 지역 단위에서 점차 인지도를 넓혀갔고, 실전성을 강조한 경기 형태로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 1968년, 한·일 교류와 ‘킥복싱’ 명칭의 병행 사용
1968년 전후, 한국과 일본 간 격투 스포츠 교류가 이뤄졌으며, 이 과정에서 일본 격투 스포츠 관계자인 노구치 오사무가 광주를 방문해 구판홍과 접촉·회담을 가졌다는 내용이 연혁 자료에 등장한다.
이 시기부터 한국에서는 기존의 ‘킹투기’와 함께 ‘킥복싱(Kickboxing)’이라는 명칭이 병행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정리된다.
다만 ‘킥복싱’이라는 용어는 동 시기 일본 등 다른 국가에서도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특정 국가의 단독 기원으로 단정하기보다는 한국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해당 명칭과 경기 형식을 제도적으로 정리·운영한 사례 중 하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문교부 사회단체 등록과 협회의 공식 활동
한국 킥복싱의 제도화 과정에서 중요한 행정적 근거로 거론되는 부분은 문교부 사회단체 등록이다.
연혁 자료에 따르면
ㆍ1968년 12월 12일, ‘한국 킥복싱협회’ 명칭으로 사회단체 등록(제29호)을 받았으며
ㆍ이후 내부 사정으로 활동이 정리된 뒤
ㆍ1970년 4월 13일, 재차 사회단체 등록(제31호)을 하며 협회가 다시 출범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당시 킥복싱이 한국 내에서 사회단체 형태로 등록·운영된 기록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행정적 사실로 정리할 수 있다.
■ 1969년 5월 30일, 장충체육관 전국대회
1969년 5월 30일, 장충체육관에서 전국 단위 킥복싱 대회가 개최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6체급 챔피언이 선발된 것으로 전해진다.
ㆍ플라이급: 김종현
ㆍ반탐급: 김광춘
ㆍ페더급: 박재혁
ㆍ라이트급: 김정대
ㆍ웰터급: 이현방
ㆍ미들급: 남목현
이는 킥복싱이 경기 종목 형태로 공개 운영된 사례로서 의미를 가진다. 다만 당시의 세부 룰과 공식 랭킹 체계 등은 추가 자료 확인이 필요한 영역이다.
■ 일본 원정과 국제 교류의 확대
연혁 기록에 따르면 1969년 12월 26일, 한국 킥복싱 선수단이 일본 원정 경기를 위해 파견됐다.
ㆍ선수단장: 구판홍
ㆍ플라이급: 김종현(전주)
ㆍ반탐급: 김광춘(광주)
ㆍ페더급: 박재혁(서울)
해당 원정은 한·일 간 격투 스포츠 교류의 일환으로 진행됐으며, 한국 선수단이 의미 있는 경기 내용을 보였다는 전언이 남아 있다. 구체적인 전적과 경기 결과는 향후 공식 자료 확보를 통해 보완될 수 있다.
■ 1977년 동양 킥복싱 연맹과 국제대회
1977년 8월 30일, 태국 방콕에서 한국·일본·태국 관계자들이 참여한 동양 킥복싱 연맹 창립총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측 인사도 주요 직책을 맡으며 연맹 출범에 참여한 것으로 정리된다.
같은 해 9월 17일에는 장충체육관에서 한·태·일 선수들이 출전한 국제 교류 성격의 킥복싱 대회가 개최돼, 한국 킥복싱의 국제적 활동이 이어진 것으로 기록된다.
■ 1970년대 후반, 확산과 분화
1970년대 후반까지 킥복싱은 국내외 경기 개최와 방송 중계 언급 등 대중 스포츠로 확산되는 흐름을 보였다.
그러나 조직 운영상의 어려움과 체육 행정 환경 변화 등으로 기존 협회는 해산 절차를 밟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다양한 명칭과 형태의 격투 단체들이 등장했으며, 글러브를 착용하고 발차기를 허용하는 경기 방식은 이전 킥복싱 경기 구조와 유사한 형태로 확산됐다. 이는 비판의 대상이라기보다, 한국 격투 스포츠가 분화·다양화 단계로 접어든 역사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정리: 한국 킥복싱사의 의미
기록을 종합하면, 한국은 1960~70년대 격투 스포츠가 정리·제도화되는 과정에서
킥복싱이라는 경기 형식과 명칭을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도입하고, 단체·대회·국제 교류까지 단계적으로 전개한 국가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누가 ‘원조’인가를 단정하기 위한 서술이 아니라, 한국 격투 스포츠사가 형성돼 온 실제 과정을 객관적으로 복원하는 데 의미가 있다.
[고지]
본 기사는 공개된 연혁 자료와 사회단체 등록 기록 등 확인 가능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으며, 특정 논쟁을 단정하거나 개인·단체를 비방할 의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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